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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를 지배하는 세력은 사기업 그중에서도 다국적 기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남아메리카의 광대한 자연을 인간의 힘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죠

그런데 이것을 가능케한 기업이 있습니다.

150억 달러를 투자해서 볼리비아에서 브라질의 동쪽 해안에 이르기까지 남미 대륙을 가로지르는 송유관을 건설했고

아르헨티나 남부에 있는 파타고니아에서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이르기 까지 장작 650만km에 이르는 세계 최장의 송유관을 건설했습니다.

 

현대 자본주의의 거대한 야망을 드러내는 이 같은 시도는 바로 주식회사의 등장 때문에 가능 했던 것 입니다.

16세기에 화폐와 신용거래의 부문에서 혁신이 일어났고, 17세기에는 채권시장이 탄생했습니다

다음단계에는 공동소유에 기반을 둔 유한 책임회사의 출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회사에 더욱 힘을 싣어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주식시장입니다.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녀석이죠.

주식은 미래의 수익에 대한 사람들의 예측을 기반으로 주식시장에서 그 가격이 결정됩니다.

하지만 최근에 발생한 금융위기에서 보았듯이, 주식시장은 쇼크마켓, 즉 충격시장으로 돌변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미래는 불안합니다. 하지만 인간에겐 낙관적인 성향이 있죠, 뉴욕 증시의 주가가 동반 상승할 때 투자자들이 도취감에 빠지는 것처럼 말이죠.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의 전 의장이었던 엘런 그린스펀은 이를두고 비 이성적인 과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과열된 주식시장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비누방울과 같죠

중남미의 거대한 송유관 사업을 벌인 엔론사를 두고 발생한 주식 과열 현상은 비이성적이었고 그 거품이 터졌을 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엔론 사태는 미국 역사상 가장 심각한 기업 사기였습니다.

주식거래가 이뤄진 지난 400여년 동안 엔론 사태가 첫 주식 사기는 아니었습니다. 이런 일은 지금도 이뤄지고있죠. 그리고 현대 금융 위기의 한 원인이기도 합니다. 회계 부정 주가 조작 몇 세기동안 끊이지않고 계속되는 일이죠

주식시장에 거품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느 것을 보면, 인류가 역사의 교훈을 외면하는게 분명합니다.

이곳 베네치아에는 금융 역사를 통틀어 깜짝 놀랄만한 일화가 있습니다.

프랑스 왕실 국가의 훌륭한 관리이자 에덴버러 출신의 존 로, 그의 업적과 삶을 기리며.

여기는 주식시장의 거품을 만든 주인공이 잠든 곳입니다.

존 로는 살인자에 상습적인 도박꾼이었지만 금융행위에서 만큼은 천재였습니다.

자산가치에 처음으로 거품을 일으켰으며 이 때문에 프랑스 시민 혁명이 일어나게되죠.

존 로는 한때 미국 영토의 1/4을 소유한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상 최초의 주가 폭락으로 그 모든 것을 잃었죠.

에덴버러에서 암스테르담, 파리, 뉴올리언스를 거쳐 베네치아에 이르기까지, 한 인간의 벼락 출세와 파멸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미국 루이지애나 주립 박물관에는 존 로 의 초상화가 소장되어있습니다.

아, 예. 여기 있군요.

깡마르고 갈망하는 표정,전형적인 스코틀랜드인의 모습입니다.

미천한 신분에서 유명인으로, 종국에는 파멸에 이른 존 로.

존 로는 1671년 영국 에든버러에서 부유한 금 세공장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694년에는 한 여인을 두고 결투를 벌이다 상대를 죽여서 사형선고까지 받았습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존 로는 감옥을 탈출해서 네덜란드로 도피하게됩니다.

도피처로 암스테르담을 선택한 것은 존 로에게 행운이었죠.

1690년대의 암스테르담은 세계 금융 혁명의 1번지였습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과의 전쟁 때문에 국영 복권을 만들어 판매했고 위조가 쉬운 주화로부터 상인들을 보호하고자 사실상 세계 최초의 중앙은행을 설립했슯니다.

이 시기에 네덜란드에서 존 로의 관심을 끈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주식회사였습니다.

주식회사는 전 세계에 걸처 활동하던 네덜란드 상인들 덕분에 생겨날 수 있었죠.

이들은 주로 아시아 지역과 거래를 했습니다.

동인도는 향신료 때문에 아주 매력적인 곳이었죠. 고추, 청양, 육두부 생강같은 그런 향신료가 유럽인들에게 인기가 있었죠. 음식맛도 내주고 또 장기관 보관할 수 있었으니까요. 네덜란드 상인들은 뱃길로 보다 신속하게 운반하고 싶었습니다. 돈 냄새를 맡은거죠.

 

최초로 동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네덜란드 상인들을 그린 그림입니다

향신료를 구하러 반텀으로 떠난 선박 네 척이 물건을 가득 싣고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오다

1598년 3월 1일 출항, 1599년 7월 19일 귀향.

과연 얼마 만큼의 이윤을 창출했을까요? 우려와 달리 단 한 번의 항해로 선박 건조 비용을 모두 회수했습니다.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 그곳으로 향한 항해는 무척이나 길고 위험했습니다.

이 때문에 상인들은 공동으로 출자 해 위험을 분산했습니다.

그 결과 동인도 회사가 6곳이나 생겼죠.

 

1602년 네덜란드 정부는 동인도 회사들을 모두 합병했습니다.

네덜란드 연합 동인도 회사를 세우기 위해서였죠. 설립 당시에 정부로부터 받은 면허장이 여기있습니다.

면허장에는 희망봉에서부터 마젤란 해협에 이르는 구간까지 무역에 있어서 전매권을 인정한다고 기재가 되어있습니다, 세계 절반에 가깝죠.

네덜란드 연합 동인도 회사의 구조는 독특했습니다. 자본금은 네덜란드의 주요 도시에 분산 돼 있었는데 정작 회사는 시민들에게 새로운 사업에 투자하라고 권유함으로써 자금을 확보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같은 투자 형태입니다.

이 그림은 동인도 회사의 창업자 중 한 명인 니르크 바스 가문의 초상화입니다.

바스를 포함해서 소위 동인도 회사에 참여자라고 불리는 17명은 6,000길드를 내고 회사의 이사진이 됐습니다.
1606년에는 동인도 회사에 투자한 사람들에게 주식, 즉 미래에 발생할 수익에 대한 권리를 일정 부분 부여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다국적 기업에서 발행한 세계 최초의 주식입니다.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의 일이죠.

 

3년후, 바스와 이사진은 주식을 환불하는 것은 불가하지만, 투자자들에게 되파는 것은 인정한다고 주주들에게 선언했습니다.

동인도 회사의 주식 거래를 시작으로 세계 최초의 주식 시장이 문을 열게됐죠.

주식의 등장은 금융 시장의 판도를 바꿨습니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주식 가격이 결정되는 세계를 창조한 것이죠.

존 로는 주주들이 동인도 회사의 주식 매매를 통해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1610년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는 세계를 정복할 태세를 갖췄습니다.

면허장을 갱신하고 새 주주들도 모집했습니다. 물론 주식거래도 활발했죠.

냉혹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때로는 전쟁도 불사했습니다.

동남아 전역에 공장과 상점을 세우고나니 이번에는 경쟁자인 스페인과 영국의 진출을 견제해야했습니다. 당시 동인도 회사는 전함 40여척과 1만명에 이르는 사병을 거느렸는데 이들의 힘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이들에게 군사력은 무역을 위한 필수 조건이었죠. 그렇다고 동인도 회사의 성공의 비결이 바타비아 함선에 탑재된 대포에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성공은 여느 대기업처럼 비용 절감을 위한 규모의 경제, 또한 경제학자들이 흔히 말하는 네트웍의 외부성, 즉 취합된 정보의 활용능력에 있었습니다. 바타비아 함선은 반은 전함, 반은 다국적 기업이었던 것이죠.

간단히 말하면, 규모가 클수록 효율적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1620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향신료 무역을 독점했습니다.

그 결과가 주주들은 돈 방석에 앉았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초창기 주주 명부입니다. 모두 엄청난 돈을 벌었죠. 창업 당시 1000길드를 투자했다면, 1736년에 그 가치는 무려 7,000길드에 이르게 됩니다. 동인도 회사는 매년 이익의 16.5%를 주주들에게 배당했습니다.

닐크 바스 가문의 투자금 6,000길드는 50만 길드의 자산으로 늘어났죠.

 

암스테르담에 숨어 지내던 존 로에게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는 하늘의 계시에 가까웠습니다.

당시 존 로는 도박판을 전전하고 있었는데 동인도 회사와 이 회사의 주식 거래를 중계했던 증권 거래소 그리고 암스테르담 은행, 이 삼자의 역학 관계에 매혹됐습니다.

하지만 뭔가 좀 부족해 보였죠. 천재 금융가인 존 로는 이들 관계에서 결함을 발견합니다.

우선 주식을 제한한 것 부터가 못마땅했습니다. 게다가 암스테르담 은행의 보수적인 운영도 이해가되지 않았죠

상인들간의 자금이체를 통해 결제가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막상 시민들이 사용할 수 있는 은행권은 발행하지 않았으니까요

이에 존 로는 암스테르담의 주식 제도 개선 방안을 놓고 고민하기에 이릅니다.

독점 무역 회사와 발권 은행이 합쳐진다면 생각지도 못했던 많은 일들이 가능하겠죠.

존 로는 네덜란드에 새로운 금융제도를 선사할 계획을 세웁니다.

 

1716년 존 로는 자신의 주식 이론을 실험할 무대로 프랑스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왜 프랑스는 그를 받아들인걸까요?

이유는 당시 프랑스의 재무 상태가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루이 14세의 잦은 전쟁 탓에 나라는 빚더미에 올랐습니다.

1715년 루이 14세가 세상을 떠나자, 루이 15세를 대신해서 보를레앙공이 섭정하는 동안 무려 세 번이나 국가 부도가 났습니다.

존 로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죠.

 

존 로의 생각은 네덜란드식 은행을 세워 프랑스 경제를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같은 백 리부르의 지폐를 발행하는 것이었죠
은행에 투자금이 들어오면 그 돈을 정부에 막대한 부채와 통합 운영하는 방식입니다.

지폐를 발행해서 프랑스의 교역을 확대하고 경제력도 키울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프랑스 왕실에서 보면 일거양득이었죠, 통합운영으로 정부의 빚을 은행 주식으로 전환했고, 군주는 원하는 만큼 돈을 발행할 수 있었습니다.

 

존 로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절대 군주는 권력이 제한된 군주보다 더 많은 융자를 보다 더 낮은 이율로 받을 수 있다.

신용에 있어서도 권력은 단 한사람에게 집중되어야 한다.

 

절대 권력은 오를레앙공의 손 안에 있었죠. 존 로는 오를레앙공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렸습니다.

금융 공학을 통해 프랑스의 패권을 부활시키는 것 만큼 훌륭한 목표가 또 있을까요?

하지만 존 로에게는 또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존 로가 말하길

은행의 설립은 내 계획중 유일한 것도 가장 위대한 것도 아니다.

나는 인도의 발견보다도 더욱 강력한 것으로 전 유럽을 놀라게 하리라.

 

존 로의 두번째 계획은 바로 독점 무역 회사를 설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전 국민이 이 회사의 주주가 되고, 그리고 존 로 자신은 대표자가 된다는 계획이었죠.

 

이 원대한 계획의 중심에는 신대륙이 있었습니다. 미국 미시시피 강가에 펼쳐진 루이지애나의 거대한 땅이 바로 그것이었죠.

마침내 존 로는 새 식민지와의 독점 무역권을 따냈습니다.

이후 프랑스 국민들은 주식 구매를 권유받았고, 이사진 명단의 맨 앞엔 그의 이름이 올랐죠.

이것은 통화팽창 정책에 가까웠습니다. 그로 인해서 1716년 경기 불황으로 몸살을 앓던 프랑스의 경기가 가까스로 회복됐죠.

프랑스 왕실에서는 공공부문의 부채를 독점 무역권과 세금 징수권이있는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으로 전환 시킬 수 있어서 마다할 이유가 없었죠. 대중들은 주식 투기의 광기에 사로잡히게됐고. 미시시피회사의 주가는 고공행진을 거듭했습니다. 1716년 9월 4일 주가는 액면가의 10배인 5000리브르를 넘어섰고, 1719년 12월에는 1만 리브르에 이르렀습니다.

존로의 주식발행사무소가 있었던 거리입니다. 이 좁은 골목에서 투기에 사로잡힌 파리의 시민들이 주식을 사려고 혈안이된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주가가 오를수록 구매의 욕구는 커져만 갔습니다. 전형적인 주가 과열 사태였죠.

 

이때부터 프랑스의 백만장자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1720년 1월에는 이들 백만장자들 중에서 존 로가 가장 부유했습니다.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가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에 반해 스코틀랜드 출신의 도망자 존 로는, "내가 곧 경제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위치에 까지 올랐습니다.

방돔 광장입니다. 이곳에서 존 로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강력한 금융 권력을 손에 넣게 됩니다.

프랑스 재무장관의 자리에 까지 올라서 많은 권한들을 행사했죠. 간접세의 징수, 국가 부채 관리, 26개가 넘는 조폐창의 관리 미시시피 회사의 운영. 이 회사는 아프리카 및 아시아 지역과의 독점 무역권을 누렸었죠

또 오늘날 미국 영토의 1/4를 차지하는 루이지애나 식민지 독점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개인 재산도 엄청났습니다. 마자렌 궁, 방돔광장 인근에 있는 건물들, 교외 저택 12척, 프랑스령 루이지애나의 수많은 농장들, 거기다 리브르 상당의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까지. 12년 전 처음 프랑스에 왔을 때 전문 도박꾼에 첩차로 의심받았던 남자치곤 대단한 성공이었죠.

1720년 1월 존 로의 승리는 완벽해 보였습니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살인범이, 프랑스의 재무장관으로 다시 태어났으니까요

하지만 존 로는 멈춰야 할 때를 몰랐습니다. 오히려 미시시피 회사의 주가를 올리려고 화폐를 더 찍어낼 궁리를 했죠.

당시 존 로가 소유했던 마자렌 궁에는 그의 은행과 회사가 나란히 있었습니다. 자신의 회사의 주가를 끌어올리려면 일단 복도를 지나서 주식발행 사무소에 들렀다가 다시 은행권 발행 사무실에 들르면 그만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내부 거래였던 것이었죠.

그의 행위는 오늘날 우리가 폰지 사기라고 부르는 것에 해당합니다.

이탈리아계의 미국인 사기꾼 찰스 폰지의 의름에서 딴 것이죠.

다단계 투자 사기처럼 뒤에 들어오는 투자자의 원금으로 앞사람의 이익을 챙겨주다 끝나는 식입니다.

존 로는 타 사를 인수하고 배당금을 지불하기 위한 재원을 주식 판매금으로 마련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느 폰지 사기처럼 언젠가는 터질 거품이었습니다.

지폐 도입과 프랑스의 경기 부양에는 성공을 했지만 그가 만들어낸 거품은 언제 터질지 몰랐습니다.

 

1720년대 초 프랑스는 미시시피 거품 즉 투자 광풍에 휩싸였습니다.

무명의 도박꾼에서 프랑스 경제의 주인이 된 존 로. 하지만 아무리 숲이 울창해도 하늘을 전부 가릴 수는 없었습니다.

존 로는 프랑스령 루이지애나에서 큰 수익을 낼 것을 장담했습니다

에덴 동산과 같은 루이지애나에서 우호적인 원주민들로부터 값비싼 재화를 싸게 구입할 것으로 상상했죠

원주민들로부터 재화를 얻으면 미시시피 강변의 뉴올리언즈를 통해 프랑스에 들여올 예정이었습니다.

식민지에 정착할 이주민들만 있으면 완벽했죠.

존 로는 프랑스인들이 식민지 개척보다는 주식투자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개척민들을 모집했습니다.

마침내 수청명이 넘는 사람들이 약속의 땅 루이지애나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로는 처참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약속에 땅 루이지애나는 벌레가 들 끓는 늪지였던 것입니다. 

일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이민자의 80%가 황열병과 같은 전염병과 기아로 숨지게 됩니다. 

루이지애나와의 독점무역권은 쓸모가 없게 돼버렸죠.

당시 네덜란드 만평의 내용입니다.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미시시피 땅입니다.

존 로의 교활한 속임수에 속아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날렸죠.

아무리 주식이 인기가 있다 해도 그저 바람과 연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존 로의 성공 뒤에는 대중들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미시시피 사태는 그 믿음을 배반한 사건이었죠.

 

존 로의 사업에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미시시피 회사의 주가는 하락했습니다.

주식 폭락을 막으려고 존 로는 보를레앙 공에게 주식의 공식 발행 가격을 내려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바로 이 순간에 절대 권력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죠.

곧이어 주가는 곤두박질 쳤습니다.

성난 군중은 은행 앞에 몰려들었고

시민들이 던진 돌에 창문은 산산히 났습니다.

12월이 되자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은 휴지 조각이 되었습니다.

1730년에 발행된 이 지도에는 세계 최초의 주식시장이 거품 때문에 어떻게 무너졌는지 묘사되어있습니다.

행운의 여신이 선물을 던지고 있고

아기 천사들에게 주식을 건네받은 투자자들이 미소를 짓고있죠

그런데 여기 부서진 인쇄기 옆에서 주식을 찍고있는 천사들이 보이죠?

그리고 거품을 만들어내는 천사들도 보이네요

오른 쪽에는 표정이 심각한 남자들이 있는데 

이중 한 명이 자살을 시도하려고 까지 합니다.

결국 미시시피 거품은 과열되다 못해 폭발했죠.

 

존 로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쫒겨 황급히 나라를 뜰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생전에 다시는 부인과 딸을 보지 못했죠.

베네치아로 돌아온 그는, 도박을 하면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결국 1729년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존 로가 일으킨 거품의 파열은 프랑스의 금융발전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프랑스인들은 화폐와 주식을 멀리했고, 프랑스 왕가의 재정 문제는 좀처럼 해결되지가 않았죠.

루이 15세와 16세의 국정 운영은 갈수록 도탄에 빠졌습니다.

결국 프랑스 왕가의 재정 파탄이 혁명을 불러오게 됩니다.

 

1719년에 터진 미시시피 거품이 주식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은 아닙니다.

단지 주식 시장의 거품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을 뿐이죠 .

금융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은 1929년 10월 24일에 터진 뉴욕 월가의 주가 대 폭락 사태입니다.

이날을 검은 목요일이라고 부를 정도면은 그 정도를 아시겠죠.

이날을 기점으로 미국 주가는 3년동안 추락을 거듭하다, 1930년 6월 바닥을 칠때는 무려 86%나 빠졌습니다.

 

뉴욕 월가의 주가 대 폭락은 인류 역사상 가장 심각한 불황을 몰고왔습니다.

미국의 국내 총 생산은 급격하게 감소했으며

실업률은 25%에 육박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가 폭락이 일어난 것일까요?

학계에서도 의견은 분분합니다.

 

기술적인 분석이야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사건의 핵심은 집단 심리에 있었습니다.

제 아무리 똑똑한 투자자라고 해도 주가가 오르는 강세장에서는 비이성적인 과열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동물들도 마찬가집니다

무리들이 방향을 틀때는 무섭게 돌변합니다.

조그만 낌세에도 벼랑을 향해 돌진하기 마련이죠

한마리가 공포를 느끼면 소떼는 공포의 냄새를 맡고 달리기 시작합니다

공포의 대상이 무언지도 모른채 그저 두려움에 휩싸여 달리는 것이죠

결국 공포가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입니다.

하하... 늘 그런식이죠... 하하하...

 

주식시장 용어로 매수세가 매도세로 전환되고 황소가 곰이되는 순간입니다. 

소떼에 비유를 했는데요 요점은 인간 심리가 시장에 반영된다는 것입니다.

시장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 기복이 아주 심합니다

순식간에 탐욕이 공포로 바뀌고

우울증을 넘어 신경쇠약증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해서 우리가 예측할 수 없을정도로 자주 발생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금융 시장의 움직임을 통계적인 

폭락이나 폭등도 없겠죠

하지만 연중 대부분을 평균적인 분포에 머물다가

예측할 수 없는 수치에 이를때도 있습니다.

인간의 키를 예로들어봅시다.

키가 120cm 이하이거나 240cm 이상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수학시간에 배운 정규 분포도 입니다.

빈도에 따라서 자주 발생하는 것들은 주로 가운데에, 아래쪽은 그보다 낮거나 높은 것들입니다

곡선이 꽤 가파르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균키에 가까우니까요

하지만 금융시장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좀 더 완만한 곡선에 가깝습니다.

그 빈도가 낮거나 높은 움직임이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통계학자가 말하는 긴 꼬리, 또는 두툼한 꼬리입니다

 

주식시장의 움직임이 사람의 키와같은 분포를 보인다면

주가가 10%이상 하락하는 일은 500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하는 정도겠죠

마찬가지로 주가가 20% 이상 폭락하는 일은 동화속 이야기일 것입니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 이런 일들은 7번이나 발생했습니다.

 

1987년 10월 사람들은 대공황이 재현될거라며 겁에 질렸는데

우려와 달리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한 달동안 죽어있던 장이 다시 급등세로 돌아섰죠.

하지만 이 시기에 발생한 거품은 범죄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미시시피 회사가 터트린 거품 속에서 18세기를 맞이했다면, 20세기를 마무리하는 거품은 다른곳에서 터졌습니다

투자자들을 탐욕의 꿈 너머로 몰아갔던 한 회사, 이 회사는 전 세계의 금융시장을 바꿔놓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막강한 정치 인맥을 활용해서  강세장의 맨 위에 올라섰습니다.

포춘지가 6년 연속 미국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선정한. 바로 엔론사 입니다.

엔론사가 파산한지도 7년이 지났습니다.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차츰 잊혀져가고있죠.

하지만 엔론사의 분식회계는 오늘날 까지도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2000년 8월 미국 휴스턴에 있는 엔론사의 주식은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았습니다.

엔론사는 네브라스카 주의 작은 천연가스 회사로 출발했고

미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월가로부터 사랑받을 수 밖에 없었죠.

 

하지만 투자자들이 역사의 교훈을 세겨들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엔론사의 이야기는 주인공만 바뀌었지 280년 전에 있었던 미시시피 거품과 유사합니다.

존 로가 프랑스의 재정개혁을 목표로 삼았다면, 엔론사의 회장 켄 레이는 국제 에너시 시장을 개혁하고자 했습니다.

거대 전력 회사들은 수년동안 에너지 산업들을 지배해왓습니다

에너지를 직접 생산해서 소비자들에게 직접 팔았죠

켄 레이는 에너지 은행을 만들어 생산자와 소비자를 중계해 에너지를 팔고자 했습니다.

엔론사를 세계 최대의 에너지 회사로 만들고 싶었죠

엔론사의 전직 임원인 세런 왓킨스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정말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아이디어만 괜찮다면 엔론사의 자금 지원으로 사업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존 로 처럼 켄 레이도 권력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조지 허버트 부시 대통령의 선거 자금을 지원해서 많은 이득을 봤죠

부시 대통령은 에너지 산업과 관련한 규제를 풀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는 에너지 민영화 추세를 타고 엔론사는 자산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중남미 지역에서는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에 이르기 까지 대규모 송유관 사업을 벌였죠

켄 레이는 절친한 친구 조지 부시 대통령의 도움을 받아서 이곳 아르헨티나에서 세계 최대의 천연 가스관을 건설했습니다.

 

엔론사는 에너지 뿐만아니라 흙 물 공기와 같은 자원을 비롯해

심지어 인터넷 대역폭까지 거래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 옛날 미시시피 사건과 흡사한 일이 뉴욕 월가에서 벌어지고 있었죠.

비이성적인 과열에 대해서 경고했던 엘런 그리스펀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주식시장에서 자금이 유동적으로 공급될때, 거품이 생성됩니다.

1990년 6월부터 1995년 2월까지 기준금리를 한 차례 올린 결과 엄청난 유동성이 확보되었죠

투자자들을 비롯해서 스톡옵션을 받은 회사의 임원들은 엄청난 부를 손에 넣을수가 있었습니다

1997년부터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엔론사의 주가는 5배로 뛰었고 20달러는 순식간에 90달러가 되었죠.

그야말로 미시시피 사태의 재현이었습니다.

 

당시 원유 매장이 있던 휴스턴의 경제는 낙관적이었는데

이곳 조차도 처음 경험하는 풍요였습니다

이곳 리버 오크스는 휴스턴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입니다.

켄 레이와 엔론 임원들 대부분이 이곳에서 살았죠

엔론이 파산하던 해에 최고위층 임원 150명에게 평균 530만 달라가 돌아갔습니다.

고급자동차가 잘 팔릴 수 밖에 없었죠

 

당시 엔론사의 임원들은 연봉을 훨씬 넘는 금액을 보너스로 받았습니다.

연봉의 75%정 도를 받으면 무안해할 정도였죠

적어도 보너스로 연봉의 4~5배는 받아야 체면이 섰으니까요. 꽤 큰 금액이었죠.

켄 레이는 회사를 운영할때 다음과 같은 윤리 기준을 내세웠습니다.

엔론사는 어떤 기업과도 정직하게 거래를 한다.

법과 규칙을 준수하고 무엇보다 신용을 우선한다.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하지만 엔론사 역시, 정교한 사기극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엘파소입니다.

엔론사의 데이비드입니다.

전력 소요가 적어서 상황이 좋질 않네요

엔론사 직원과 엘파소 전기회사 직원이 나눈 대화를 녹음한 것입니다.

전력을 제한하는 방법으로 발전소 가동을 중단하는 것을 논하고있죠

화력발전기 한대를 껏다가 가동하는데 얼마나 걸리죠? 3~4시간이면 충분하죠?

네 그럼요 

괜찮다면 1대 정도는 잠시 꺼두죠

그러죠.

결과적으로 엔론의 주가는 상승했지만, 소비자들은 정전 때문에 불편을 겪어야 했죠.

엔론사는 이런식으로 벌어들인 돈을 온갖 방법으로 횡령했습니다.

장부를 조작해서 자산을 증액하기도 했죠

그리고 특수목적 법인을 설립해 대차대조표 상의 부채를 숨겼습니다

이중에는 츄코나 랩터와 같이 기업명이 독특한 법인들도 있습니다.

엔론사는 손실을 이익으로 둔갑시키고자 다양한 속임수를 썼습니다.

하지만 오래가진 못했죠.

장부를 조작하다보면 결국은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야망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자 켄 레이와 임원들은 수억달러의 주식을 시장에 내다 팔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대중들에게는 주가가 계속 오를 것이라고 헛소문을 퍼트렸죠.

존 로가 미시시피 회사의 주가 폭락을 막지 못했던 것처럼, 켄 레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001년 11월 15일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의 의장 엘런 그린스펀은 공공 서비스 분야에서 엔론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수상은 당연했습니다.

1990년대말 엘런 그리스펀의 금융정책 결과로 엔론 거품 및 IT 거품이 터졌으니까요 .

그 수상식이 끝나고 2주만에 엔론사는 파산 신청을 했습니다.

과연 빚이 어느정도였을까요?

2001년 엔론사는 파산 신청을 하려고 채권단과 만난 자리에서 폭탄 선언을 했습니다

대차대조표 상에는 장기 차액금이 130억 달러라고 나와있었지만 사실은 380억 달러라고 밝혔죠

무려 250억 달러의 부채가 장부 뒤에 숨어있어던겁니다.

부채금액에 다들 놀랐겠군요, 설마 그정도 일줄은 상상도 못했겠죠?

그럼요 모두 놀라서 쓰러질 지경이었어요

 

엔론사의 직원 4,500명이 해고되기 바로 전날, 임원들에게는 최후의 만찬으로 보너스가 지급됐습니다.

2006년 5월 켄 레이는 유가증권법 및 통신법 사기죄로 기소 돼, 유죄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의 심복 제플리 스킬링은 24년 징역형을 선고받았죠

켄 레이는 형이 확정되기 전 콜로라도주에있는 아스펜에서 휴가를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사라졌지만 그가 저지른 부정한 수법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엔론사가 벌인 분식 회계는 서양 금융권의 관심을 끌었죠.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같은 부정행위 때문에 오늘날의 금융위기가 발생한 것입니다.

 

엔론사의 분식 회계 방식에이 마치 전염병처럼 금융권에 퍼진 것입니다.

엔론사의 거래원들과 은행직원들 그리고 에너지 거래소 직원들까지 말이죠.

금융시장 전말이 부패한 것입니다.

 

유한책임주식회사는 놀라운 조직입니다.

하지만 이 회사가 등장하고부터 기업들의 부정행위는 늘었고

주식시장들도 비이성적일때가 많았습니다.

사실 기업과 주식시장은 쌍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한 쪽이 이유없이 날뛰면 다른쪽도 휩쓸려 날뛰니까요

 

지난해에 발생한 금융위기에서 경험했듯이

금융시장은 우리 뜻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신용 경색이 시작되고 주가가 반토막이난 경우를 세계 각지의 주식시장에서 쉽게 볼 수 있었죠

미래에대한 기대치가 과도한 낙관에서 과도한 비관으로 바뀌고

사람들이 탐욕이 공포로 돌아서는 순간, 주가는 또다시 불규칙한 곡선을 그릴 것입니다.

마치 안데스 산맥처럼 말이죠.

투자자로서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정상에서 내려올 때,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평탄한 언덕을 따라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위태로운 금융 시장에서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돈의 힘 4부에서는 수익만큼 중요한 위험 요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때까지 이 질문을 되새겨 보십시오.

보험에 가입하셨나요? 아니면 헷지상품에 투자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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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대통령이나 의회의 수상이 권력을 쥐고있다고 생각을합니다

과연 그럴가요? 현대 사회에서 진정한 권력은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 쥐고있습니다.

그들은 세계 채권시장을 좌우하는 이들이죠.

빌 그로스는 세계 최대의 자산 운용사인 핀코의 회장입니다. 이 회사는 무려 7조 달러나 되는 금융 자산을 운영하고있죠.

사람들은 그를 채권시장의 황제, 미스터 본드라고 부릅니다.

채권은 금융 거래 시장과 정치권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입니다. 정부는 징수한 세금보다 더 많은 돈을 지출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경우 채권을 팔아서 그 차액을 메우죠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구입한 채권을 처분하고 싶을 땐, 금융거래 시장에 그 채권을 내다팔면 됩니다.

 

금융의 역사에서 채권시장의 탄생은 은행의 대두 다음으로 큰 혁명이었습니다.

정부가 돈을 빌릴 수 있는 새로운 창구가 열린거죠.

약 600년전 이탈리아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채권시장에서는 전쟁자금을 지원하게 됩니다.

채권 시장은 워털루 전투의 승패를 결정했고, 세계적인 금융 가문을 탄생시켰습니다

미국 남북전쟁에서 남부가 패한 원인이기도 했죠.

아르헨티나와같은 부국을 무릎 꿇게 했을 정도로 채권시장의 힘은 막강합니다.

오늘날 세계 각국의 정부와 회사들은 채권을 담보로 엄청난 돈을 빌리고있습니다.

약 85조 달러의 채권이 시장에서 거래되고있죠.

우리의 운명은 채권 시장에 달렸습니다

채권시장이 포화상태가 되면 자산가치가 높은 집값은 하락합니다.

2007년 여름에 전 세계를 강타한 경제 위기, 이런 혼란 속에서 미국의 국공채는 투자자들의 안전한 은신처가 됐습니다.

만약 빌 그로스가 채권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다면 세계 경제는 그야말로 원자폭탄을 맞을 것입니다.

빌 그로스는 영화 007에 나오는 미스터 본드보다 강력한 힘을 갖고있습니다.

이 두명의 본드에겐 일종의 살인 면허가 있는 셈이죠.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전쟁을 두고 모든 것들의 아버지라고 말했습니다.

채권시장을 낳은 것도 바로 전쟁이죠.

피렌체와 피사, 시에나등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도시들은 중세 대부분을 전쟁 속에서 보냈습니다.

전쟁의 원인은 인간의 탐욕과 돈이었죠.

피테르 반 헤이든의 판화 돈자루와 괴의 전쟁에는 돼지 저금통과 보물상자 동전이 가득한 자루들이 창고 칼 사이에 어지럽게 놓여있습니다. 그림에는 이런 문구도 적혀있습니다. 이 전쟁은 돈과 제물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돈이 없다면 전쟁도 없다는 그런 뜻이겠죠.

 

채권 시장을 통해 전쟁 자금을 지원하는 방법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 발명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르네상스 시절 도시 국가들은 주변국의 영토와 재산을 몰수하기 위해서 콘도티에리, 즉 용병 징집을 고용했습니다.

1360년대와 70년대에 활동했던 콘도티에리 중에서 주목할 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피렌체 대성당에 전시된 그림속 인물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영국 잉글랜드 에섹스 지방 출신인 그는 타고난 전쟁 광이었습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를 존 호크우드 경, 이탈리아어로 지오바니 아큐터라고 불렀죠 이 성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그에게 피렌체 사람들이 보상 명목으로 제공한 부동산 중 하납니다.

호크우드는 용병이었기 때문에 돈만 받으면 누굴 위해서든 싸웠습니다. 밀라노, 파도바, 피사 등 도시국가들은 물론 교황까지도 그를 고용했죠.

 

피렌체의 베키오 궁전에 전시된 이 벽화는 1364년 피사와 피렌체의 전쟁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당시 호크우드는 피사의 용병 대장이었지만은 15년 후에는 돈을 받고 피렌체를 위해서 싸웁니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은 결국 위기에 처합니다.

이들 국가들의 지출은 해마다 두 배로 늘었고, 시민들이 내는 세금도 마찬가지였죠.

또한 용병들에게 임금을 지불하느라 늘 적자에 허덕였습니다.

 

피렌체의 공문서 보관소에 있는 이 자료에 따르면, 14세기 초에 5만 플로린에 이르던 시의 부채가, 1427년에는 500만 플로린으로 늘었다고합니다. 부채가 산더미처럼 쌓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엄청난 금액을 과연 어떻게 충당을 했을까요? 답은 바로 피렌체 시민들에게 있습니다.

정부가 시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대신에, 시민들로부터 돈을 빌렸던 것입니다. 물론 의무적으로 말이죠.

 

시민들은 이러한 강제성을 수반한 대부의 대가로 이자를 받았습니다.

장부에 적힌 이 부채의 목록이 바로 정부 채권입니다. 당시의 정부 채권은 유동 자산으로 급전이 필요할 때면 팔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죠. 이 장부는 피렌체 정부가 시민들을 어떻게 투자가로 변신 시켰는지를 보여줍니다.

 

채권은 도시국가의 파산을 막았고, 시민들은 이자를 받아서 모두에게 남는 장사였죠.

채권 시장은 시민들의 거래를 허락했습니다. 그러자 공공 채무가 정리된 것처럼 보였죠.

하지만 이 멋진 발상에도 치명적인 결점은 있었습니다.

 

아무 이득이 없는 전쟁을 계속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탈리아의도시들은 부채가 늘자 채권을 더 많이 발행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채권의 가치는 떨어졌습니다.

결국 베네치아에서 사건이 터졌습니다. 16세기 초 베네치아에서는 군인들이 여러차례 폭동을 일으켰는데, 그 일로 베네치아의 채권 가치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1509년부터 29년까지, 베네치아의 몬테누에보 채권은 액면가 10%에 거래됐었습니다.

전쟁중에 채권을 사려면은 어느정도 위험은 감수해만합니다.

정부가 원금이나 이자를 지급하지 못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채권은 액면가에 따라 이자가 지급되기 때문에 운이 좋으면 액면가의 10%만 지불하고도 이자를 50%까지 받을 수 있죠. 이것이 바로 채권시장의 원리입니다. 위험을 감수할 용기만 있다면, 원금을 회수할 수도 있는 것이죠. 또한 금융시장 전체 이자율을 결정하는 것 역시 채권시장입니다.

 

르네상스 시절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고안된 채권이 전체 금융 이자율까지 좌지우지하게 된 것입니다

채권의 힘이 막강해진 것이죠 그 후로도 계속 채권은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로스차일드가의 저택

워털루 전투의 승패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금융 재벌의 저택입니다.

이 가문은 자타가 공인하는 금융 황제를 배출했죠. 그는 19세기 채권시장의 진정한 황제였습니다.

엄청난 부를 소유했던 네이선은 자신이 전쟁과 평화의 중재자라고 큰 소리 쳤습니다

또한 국가의 신용이 자신에 손에 달렸다고도 했죠.

 

이는 뛰어난 채권 거래상이자 훗날 세계 최대은행의 주인이 될, 네이선 로스 차일드를 두고 1928년 영국 의회의 급진파 의원이었던 토마스 채권 시장은 돈스컴이 했던 말입니다.

채권 시장은 로스차일드 가문에게 엄청난 부를 선사했습니다.

이들은 유럽 전역에 걸쳐 41채나 되는 저택을 소유했을만큼  큰 부자였죠.

버킹엄 쇼에 위치한 이 저택은 현재 네이선 로스차일드의 4대손인 제이콥 로스차일드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4대의 조부는 영리한 분이었습니다. 욕심도 많았죠. 늘 뭔가에 집중하셨는데, 함께있으면 즐거운 사람은 결코 아니었죠.

 

1810년부터 1836년 사이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의 다섯 아들들은 국제 금융계의 거물로 급부상합니다.

영국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을 일으킨 장본인은 셋째 아들 네이선이었습니다.

네이선의 고손자인 에블린 로스차일드는 네이선이 설립한 은행의 회장직에서 최근에 물러났습니다,

고조부는 야망이 컸습니다. 그래서 영국으로 이주하셨죠

어리석음을 싫어하셨는데 우리 가문의 내력이죠.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형제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는 누가 보지 못하게 항상 주덴도이치로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를 보면은 그가 형제들에게 자신의 직업정신을 심어주고자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몇 줄 읽어 드리죠.

사랑하는 큰형님 형님에게 편지로 제 생각을 전하는 일은 제 의무입니다.

형님을 아실 거에요. 저는 지금까지 줄곳 저녁식사를 마치고 난 뒤, 흔히하는 독서나 카드놀이 영화감상같은 취미생활을 하지 않았어요.

저의 유일한 즐거움은 사업뿐이죠.

 

열정과 타고난 경제적 감각을 바탕으로 네이선은 게토의 무명인에서 런던 채권 시장의 황제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금융시장이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는데, 역시 전쟁을 통해서였죠.

 

1815년 6월 18일 아침 영국과 네덜란드, 독일 병사들 67,000여명이 영국의 웰링턴 공작의 지휘아래 벨기에 남동부에 위치한 워털루에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황제인 나폴레옹이 이끄는 군대가 진격해오기 있었기 때문이죠.

 

워털루 전투는 영국과 프랑스 간의 갈등이 절정에 이른 결과로, 두 나라 금융제도의 우열을 가르는 전투였습니다.

전쟁 자금을 약탈에 의존했던 프랑스와 채권에 의존했던 영국의 금융 싸움이었죠.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영국 정부는 전례없는 엄청난 양의 채권을 발행했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백만장자가 된 건. 워털루 전쟁의 승패가 채권 가격에 미칠 영향을 정확히 예측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00년 후, 나치 독일은 이 유대인 가문의 부당 이익을 폭로하기 위해서 영화 로스차일드가의 상영을 허가합니다.

영화에 따르면, 네이선은 프랑스 장군을 매수해 영국군의 우세를 확인합니다.

그리고나서 영국군이 열세라고 런던에 헛소문을 퍼트리죠.

놀란 영국인들이 정부 채권을 헐값에 처분하자, 네이선은 서둘러서 채권을 사 들입니다.

하지만 1815년 상황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워털루 전투에 대한 거짓 정보를 흘려서 큰 돈을 벌 것으로 예상을 했는데, 오히려 최대 위기를 맞습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해드리죠.

영국 정부는 채권 판매로 엄청난 양의 현금을 보유하게됩니다.

하지마 웰링턴 공작에게 채권은 쓸모가 없었죠.

군인들에게 급여를 주고,동맹국들에게 사례를 주려면 언제 어디서나 지불 가능한 통화가 필요했습니다.

결국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채권시장에서 빌린 돈을 금으로 바꿔 웰링턴 공작에게 전달합니다.

이를 계기로 전쟁 당사국들은 물론 전 유럽의 운명이 바뀌었죠.

 

이 편지 한 장이 영국 정부와 로스차일드가의 운명을 바꿔놨습니다

1814년 1월 11일 영국의 재무 장관은 영국군 총 사령관에게 편지를 보내서 네이선 로스차일드를 영국 정부의 대리인으로 임명할 것을 명합니다. 네이선의 임무는 유럽대륙에서 금과 은을 최대한 많이 모아 프랑스 남부로 진격 중인 웰링턴 공작에게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네이선은 유럽 전역에 뻗어있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신용 네트웍을 이용해서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합니다.

전쟁중에 많은 양의금을 운반하려면 그만큼 위험 부담이 큽니다. 하지만 로스차일드 가문은 위험한 만큼 고액의 수수료르 받을 수 있어서 괜찮은 거래라고 생각했죠. 곧이어 영국 정부의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로 부상합니다.

영국군 총 사령관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자신의 임무를 존경스러울만큼 훌륭하게 수행했다. 그가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린 그를 믿는다.

로스차일드는 가족 중심의 은행 네트웍을 구축해 전쟁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셋째 아들 네이선은 런던에, 장남 암셀은 프랑크 푸르트에, 막내 제임스는 파리에

넷째 칼은 암스테르담에 있었고

둘째 살롬을 유럽을 오가며 작전을 도왔습니다.

예를들어 파리에 금 값이 런던보다 비쌀 때는 파리에 있는 막내 제임스가 금을 팝니다.

그 다음엔 런던에 있는 네이선이 사는 방식이죠.

 

로스차일드 가문이 금융시장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유럽의 금융 유지에 형제들을 심어놓았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금융 네트웍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충분히 활용했던 것이죠, 어쨋든 세계를 좌우할 정도로 막강한 금융 네트워크를 구축한 점은 놀랍습니다.

 

1815년 3월 나폴레옹은 유배지인 엘바섬을 탈출해 파리로 돌아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즉시 금괴와 은괴, 동전들을 사모으기 시작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나폴레옹이 주도한 이전의 전쟁들이 그랬듯 장기전이 될거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죠

결국 사람들은 금을 찾을테고 당연히 가격도 오를테니까요.

하지만 이는 엄청난 계산 착오였습니다.

 

하루동안의 치열한 공격과 반격끝에 프로이센 군대가 합세하면서 전쟁의 승패가 결정됐습니다.

웰링턴 장군은 명예로운 승리를 거뒀습니다.

반면에 로스차일드가는 아니었죠.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발빠른 정보망을 통해 나폴레옹의 패배의 소식을 접하고 기뻤겠죠

그는 영국 내각에 공식 보고가 되기 이틀전에 이미 승전보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승리는 네이선에게 득이될게 없었습니다.

그는 무용지물이 된 금을 싼 값에 샀을 뿐이니까요.

전쟁이 끝난 뒤, 그와 형제들은 아무도 원치 않는 금더미 위에 앉아있었던 것 입니다.

전쟁이 끝나며 군대는 해산될 것이고 군인들에게 금을 지급할 필요가 없게되면 치솟았던 금값이 폭락할건 불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엄청난 손실을 코 앞에 두고 네이선은 결심을 합니다.

해결책은 오직 하나. 로스차일드 가문의 금을 이용해 도박을 하는 것이었죠. 바로 채권시장을 통해서 말이죠.

1815년 7월 20일 런던 쿠리어 신문은 네이선이 공채를 대량으로 매입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영국 정부의 채권을 사들였다는 뜻이죠. 워털루 전투의 승리로 영국의 채권 가격이 치솟을 것이라는 예측에 네이선은 승부수를 띄웠습니다.

채권의. 대량 매입으로 가격이 오르기 시작하자 네이선은 계속해서 채권을 사들였습니다.

채권을 팔라는 형제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렸죠. 그 후로 일년이나 계속해서 말입니다.

 

1817년 7월, 채권 가격이 40% 까지 상승하자 네이선은 채권을 되팔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그가 남긴 시세 차익은 현재로 치면 약 6억 파운드에 이릅니다.

로스차일드가문은 채권을 사고 팔아 이익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돈은 곧 권력이라는 사실을 증명했죠.

 

메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는 다섯 아들들에게 사랑받기 보단 사람들을 너희들을 두려워하게 만들라고 당부했습니다

실제로 19세기 중반에 금융권을 지배하는 동안, 로스차일드 가문은 존경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죠. 

지금은 증오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반유대주의의 편견을 자극했기 때문이죠.

 

포스터를 수집하는 동료가 몇달 전에 반유대주의를 표방한 아주 독특한 포스터를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 로스차일드 가문을 남을 괴롭히는 지독하고 못된 사람들로 표현했더군요.

유대인들이 행했던 자본주의 경제 활동을 아주 신랄하게 비판한 포스터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로스차일드 가문을 증오하는 이유는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고 막기도 하는 그들의 양면성 때문입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전쟁이 필요했습니다. 전쟁을 통해서 부를 창출했으니까요.

전쟁이 없었다면 19세기 국가들은 채권을 발행할 필요도 없었겠죠.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전쟁 자금을 마련하려면 정부는 엄청난 빚을 지게 되고 만약에 빚을 갚지 못하게 되면 이미 발행한 채권에 문제가 생기고말죠.

19세기 중반에 로스차일드 가문은 펀드 매니져가 되어 국공채를 관리합니다. 그로 인해서 전쟁을 통해 얻는 득보다, 실이 많게 되죠.

 

로스차일드 가문은 돈의 힘으로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의 승리를 도왔고 미국 남북전쟁에도 영향을 줬습니다.

채권시장의 황제가 전쟁의 조정자가 된 것이죠.

워털루 전투가 끝나고 50년 후, 지구 반대편에서는 또다른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전쟁 역시 배후에 채권시장이 있었죠.

하지만 채권을 믿고 승부수를 던진 사람들은 과거와 달리 패하고 맙니다.

전쟁이 발발하고 2년 뒤, 1863년 6월 미국 남북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당시 북군은 미시시피주의 수도였던 잭슨을 점령하고 남군을 서쪽의 빅스버그까지 후퇴시킵니다.

북군에 포위된 채 끈질기게 저항하던 남군은 결국 한달만에 항복을하고 맙니다.

빅스버그 전투 후, 미시시피강은 북군의 손에 넘어갔고 남군은 동서로 분열됐습니다.

그렇다고 남군이 패한 결정적인 요인이 빅스버그에서의 후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패전의 진짜 이유는 바로 재정 문제였습니다.

 

빅스버그에서 하류로 내려가면 미시시강과 멕시코만이 만나는 곳에 뉴올리언스 항이 있습니다.

파이크 요새입니다. 영국의 공격으로부터 뉴올리언스를 지키기 위해 1812년에 세운 것이죠.

하지만 50년 후, 북군이 뉴올리언스를 공격했을때, 요새는 그만 함락당하고 맙니다.

당시 뉴올리언스는 남부의 주력 수출품인 목화의 판로였기 때문에 손실이 아주 컸죠.

목화 무역을 주도할 수 없게되자 남부의 운명은 달라졌습니다.

목화는 채권 시장을 전쟁에 끌어들이려는 수단이었기 때문이죠.

500여년 전,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처럼 남부연합은 시민들에게 채권을 팔아 전쟁비용을 충당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남부의 자본은 한정돼있었죠. 고민 끝에 남부 연합은 유럽 최대의 금융가문인 로스차일드가에 손을 내밉니다.

 

남부연합이 이를 낙관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미국의 로스차일드 대리인이 새롭게 당선된 링컨 대통령에게 반감이.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로스차일드가는 남부연합의 손짓에 주저했습니다. 남부에 돈을 빌려줄 수도 있지만, 이미 가치를 상실한 남부의 채권을 사들이는 것은 모험에 가까웠으니까요. 결국 로스차일드가는 나서지 않기로 결정했죠.

궁지에 내몰린 남부연합은 새로운 작전을 구상했습니다. 바로 목화를 이용하는 것이었죠.

남부는 목화를 채권 지급 담보물로 내놓았습니다.

이자를 지급하지 못할 경우 목화로 대신하겠다며 투자자들을 안심시켜죠

결국 남부의 대리인들은 남부연합의 채권을 팔기위해 유럽의 주요도시로 떠났습니다.

그들은 유럽의 금융 요지를 중심으로 채권을 팔기위해 노력했지만, 투자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프랑스의 한 무명 회사가 목화 담보 채권을 시장에 내놓자 상황은 역전됐습니다.

그 이유는 회사 채권을 목화로 전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것도 전쟁 전 가격으로 말입니다.

목화담보 채권은 남부의 새로운 전략적 토대가 됐습니다.

목화의 공급을 제한할 경우  목화와 채권의 가격이 동반 상승할 테니까요.

이제 남부연합은 목화로 영국을 위협하기에 이릅니다.

 

1860년 영국의 리버풀 항은 섬유 산업에 필요한 목화를 수입하는 주요 관문이었습니다.

당시 리버풀로 들어오는 목화의 80%는 미국 남부에서 생산되는 것들이었죠.

목화의 중요성을 안 남부 연합은 리버풀로 향하는 모든 선박의 출항을 금지했습니다.

영국을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려는 전략이었던 것이죠.

결국 남부의 의도대로 목화값이 치솟았고 남부연합의 목화 담보 채권도 덩달아 가격이 올랐습니다

출항 금지 조치는 영국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고 방직 공장들은 노동자들을 해고해야해습니다.

결국 1862년 말에 모든 방직공장이 가동을 멈췄습니다.

맨체스터 남부 스타열에 위치한 이 방직 공장에는 노동자 400여명이 근무했는데 목화가 없으니 당연히 할일이 없었겠죠

결국 공장 노동자중 절반 가량이 해고됐고 지역 주민중 1/4정도가 빈민 구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 사태를 두고 목화 기근이라고 불렀지만 이는 인위적인 기근이었던 것이죠.

 

영국 경제는 침체에 빠졌고 목화담보 채권의 가격은 계속 상승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부가 채권 시장을 마음대로 조종하려면 투자자들이 채권의 이자를 지급받지 못할 경우 남부가 나서서 목화 소유권을 보장해준다는 전제조건이 필요했습니다.

앞서 1862년 4월 28일 뉴올리언스가 합락됐을 때, 미국 남북전쟁이 전환기를 맞이했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결국 남부의 주요 항구가 북군의 손에 들어가자 목화를 손에 넣고 싶어하는 투자자들은 북군 해군의 철통같은 봉쇄선을 뚫어야 했습니다.

 

남부연합이 목화 공급을 중단하자 1863년 랭커셔의 방직 공장들은 중국과 이집트 인도지역에서 새로운 목화 공급원을 찾았습니다.

그러자 목화 담보 채권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와 남부 경제가 동시에 붕괴됐습니다.

목화 공급 능력을 과시했던 남부연합이 보기좋게 무너진 것이죠.

국내 채권시장이 몰락하자 당장 전쟁 비용을 지급해야했던 남부연합은 루이지에나 주립박물관에 있는 이러한 지폐들을 마구 찍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남부연합은 총 17억 달러를 발행했다고 합니다. 북부연합도 지폐를 발행했는데, 전쟁 막바지에 북부의 그린백이 장당 50센트였다면. 남부의 그레이백은 1센트에 불과했죠. 결국 남부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1865년 1월엔 물건 값이 기존 가격에서 90배로 치솟기도 했습니다.

승부를 채권시장에 걸었던 남부는 결국 전쟁에서 패했습니다.

하지만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몰고온 이같은 무모한 시도는 그 후로도 계속 반복됩니다.

 

오늘날의 채권시장은 전 세계 주식시장을 합한 것보다 그 규모가 큽니다.

한 국가의 흥망성쇠를 결정하기도 하죠

채권시장의 황제라 불리는 이 사람이 한때 라스베가스에서 활약했던 카드선수였단 사실을 아십니까?

저는 블랙잭선수였는데 최초의 직업 선수중에 한명이었습니다. 꽤 잘나갔죠. 라스베가스를 정복해보고싶은 마음에 60년대 말부터 카드플레이어로 몇년동안 활동했습니다.

 

빌그로스는 현재 채권시장의 황제가 되어 거액의 채권 펀드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빌 그로스의 채권 거래는 금융시장과 정부를 비롯해서 연금기금과 주택담보대출 이자율에도 영향을 주죠.

하지만 세계 금융시장을 호령하는 채권 황제도 두려운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인플레이션입니다.

인플레이션이 위협적인 이유는 채권의 고정 이율 가치를 떨어트리기 때문입니다.

 

예를들어 물가가 10% 상승했는데 고정 이율의 가치가 5%밖에 안 된다면 채권 소유자들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5%나 손해를 보는거죠.

그렇기 때문에 인플레이션 초기에 채권 가격이 하락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엔 폭락을 지속하기도 합니다.

인플레이션이란 고약한 녀석 때문에 상황이 어떻게 악화되는지 궁금하시다면, 아르헨티나를 예로 들어보죠.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1946년 2월부터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이 시기에 대통령에 선출된 후안 페론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중앙은행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은행에 넘쳐나는 금을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구나, 은행 전체가 금으로 가득해 걷기조차 힘들다니.

 

아르헨티나는 은의 땅이라는 뜻으로 부와 풍요를 상징합니다. 수도를 따라 흐르는 리오델라플라타강 역시 은의 강이란 뜻이죠.

한때 부에노스 아에레스에는 영국이 최고급 백화점인 헤로즈 백화점이 있었습니다

1912년에 설립된 헤로즈 백화점은 아르헨티나의 화려한 과거를 말해주고있습니다.

아르헨티나와 미국의 1인당 국민 소득의 차액이 불과 18%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그런시절도 있었죠.

결론적으로 말해 아르헨티나와같이 자원이 풍부한 나라도 금융위기가 반복되면 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경우입니다.

아르헨티나는 금융 위기를 여러번 겪었습니다. 하지만 1989년의 위기는 과거의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죠.

 

당시 아르헨티나에선 2월 초였는데도 전례 없는 더운 날씨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턱없이 부족했던 아르헨티나의 전력 설비 때문에 정전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하지만 정전 사태는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죠.

다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금융 파국은 몇가지 단계를 거칩니다.

첫번재 단계는 징수한 세금에 비해 정부 지출이 과다한 경우입니다.

전쟁이 원인일 때가 많죠, 아르헨티나는 1970년대 내전과 1982년 포클랜드 제도를 둘러싼 영국과의 전쟁이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1989년 결정적인 위기가 찾아오죠

2월이 되자 물가가 10%나 상승했습니다. 불과 한달만의 일이었죠. 정부는 은행을 폐쇄하고 이자율을 낮추는등 환율 폭락을 막기위해 노력했습니다. 효과는 없었죠. 한달만에 아르헨티나의 화폐가치는 달라에 비해서 140%나 하락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아르헨티나의 정부가 공공부문의 적자 해소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세계은행은 대출을 동결했습니다.

세계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없게되자 아르헨티나 정부는 공채를 발행해 재정 적자를 메우려했습니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인플레이션으로 몇일 뒤면 휴지조각이 될 채권을 살 생각이 전혀없었죠. 결국 아르헨티나 정부는 난관에 봉착합니다.

그해 4월 한 슈퍼마켓이 물건 값을 30%나 올리겠다고 하자 사람들은 분노했고 쇼핑카트를 부수기까지 했죠.

진열장은 텅 비었지만 가게 주인들은 새 물건을 살 돈이 없었습니다.

당시 상황은 정말 끔직했어요. 같은 물건인데도 아침 저녁 가격이 달랐으니까요. 손해를 볼까봐 팔 수도 없었죠. 적당한 가격에 팔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오르는 거에요. 하루에 서너번 이상 가격이 올랐었죠.

 

중앙은행이 외환 보유고 잔고가 바닥나고있다는 소문이 돌자 국공채 가격이 폭락했습니다. 외채도 빌릴 수 없고 누구도 채권을 사려하지 않자 절망에 빠진 아르헨티나 정부는 중앙은행을 통해 화폐를 더 많이 발행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효과가 없었죠.

 

4월 28일 금요일 마침내 아르헨티나의 국고가 바닥났습니다.

기자회견장에서 중앙은행 부총재는 이것은 물리적인 문제입니다라고 말했다죠.

즉 아르헨티나 조폐국에서 종이가 떨어져서 더 이상 돈을 찍어낼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부총재는 월요일이면 화폐가 발행될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하지만 화폐를 찍어낼수록 돈의 가치는 하락했고 정부는 점점 더 액면가 높은 돈을 발행할 수 밖에 없었죠.

5월에는 커피 한 잔 값이 일주일만에 50% 올랐고, 신발 세 켤레가 소 한마리의 가격과 맞먹기도 했습니다.

1989년 6월 아르헨티나의 물가 상승률은 100%에 육박했습니다. 일년에 12000%가 상승한거죠. 예를 들어서 올해 부에노스 아에레스의 한 식당에서 음식 값으로 만 아우스트랄을 냈다고 가정을 해보겠습니다. 그럴 경우 6월 에는 2만 아우스트랄을, 그 다음달에는 6만 아우스트랄을 지불해야만했죠. 이렇게 지폐를 양손 가득 들고나가야 저녁 한끼를 해결할 수 있던 것입니다.

 

분노한 시민들은 이틀에 걸쳐 폭동을 일으켰고 굶주리다 못해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매 끼를 스테이크와 와인을 곁들여 먹던 이들이 부엌에서 스프로 끼니를 떼우거나 굶어야 했습니다.

하이퍼 인플레이션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들은 일당을 현금으로 받는 근로자들이었습니다.

매달 고정 급여를 받는 공무원들도 피해를 봤죠. 연금 수령자들과 투자금의 이자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채권 소유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현금이 필요했던 중산층은 보석과 시계 식기들을 내다 팔기까지 했는데 당시 확보한 골동품을 파는 가게들이 지금도 성업중입니다,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즈는 채권 소유자들의 안락사를 예언하면서 인플레이션이 로스차일드 가문과 같은 금융 재벌의 부를 잠식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인플레이션이 전 세계를 휩쓸던 1970년대에는 케인즈의 주장이 사실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채권 황제는 물론 채권 소유자들은 보란듯이 소생했습니다.

채권시장이 부활하자 놀란 미국의 관리들은 방금 찍어낸 새 채권을 팔아 구제 금융에 투입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이 같은 채권황제의 부활은 채권 투자자들의 수가 증가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600년 전, 채권 시장이 탄생했던 이탈리아로 다시 가볼까요?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노령화 속도가 가장 빠른 나랍니다.

노령화 사회에선 채권과 같이 수익이 고정된 증권이 주로 거래됩니다.

그런데 인플레이션이 연금과 예금의 가치를 떨어트릴것이라는 걱정이 큽니다

그러므로 인플레이션에 관대했던 중앙은행은 채권시장에 그 해결책을 내놓아야 합니다

또한 정부가 금융위기로 파산한 은행들을 구제할 계획이라면 신중해야합니다.

채권을 더 팔아 국고 재원을 확보할 생각이라면 말이죠.

 

현대유럽에서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처럼 정치권력과 금융시장 사이의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랬던것 처럼 세상의 진정한 지배자는 미스터 본드나 채권시장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정부에 돈을 빌려주기보다, 특정 회사의 주식에 투자하는 것을 선호하십니까?

과연 어느 쪽이 위험성은 낮으면서 수익성이 높을까요?

 

다음편에서는 주식시장의 거품과 붕괴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왜 금융사를 통해 교훈을 얻지 못하는지 그 이유 또한 설명해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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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돈의 세계입니다. 금전 화폐 엽전 등 돈을 일컫는 말들은 무척 다양하고 많습니다. 돈을 뭐라고 부르든간에 돈에 울고 돈에 웃는 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지난 한해 뉴욕 월가와 런던 시티 금융가의 큰손들이 많은 눈물을 흘렸었죠. 세계를 호령하는 큰손들이 나락으로 떨어지는동안 사람들은 돈을 은행에 예금해야할지 집안 금고에 넣어야할 지 걱정했습니다. 

 

2007년 여름에 시작된 금융위기,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미국에 국한된 서브프라임 모기지 문제가 어떻게 해서 월가의 거대한 회사들을 부도로 몰아가고 대서양 은행들을 국유화시킬 정도로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을까요?

 

전 세계의 경제를 얼마나 초토화 시켰던지, 이 프로그램의 제목을 돈의 추락으로 바꿔야 되는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부터 돈이 우리의 삶에 깊숙히 개입하게 된 과정을 저와함께 살펴보시겠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이어져 내려온 금융사의 뒷 이야기입니다.

은행의 지원으로 르네상스 운동이 전개되었고 채권 시장의 움직임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갈렸습니다.

주식 시장을 기반으로 대영제국이 일어섰고, 화폐가치의 붕괴가 프랑스 혁명을 초래했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현대 런던에 이르기까지 돈의 번영은 곧 인간의 번영이었습니다.

하지만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금융사는 반복되는 위기의 역사였고 오늘날의 금융위기도 그중  한페이지에 불과합니다.

출렁이는 부동산과 중국의 급속한 산업화까지 금융의 막대한 짐은 우리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알고계십니까? 은행이 파산하거나 금융시장이 붕괴되고 주식시장이 폭락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서브프라임과 프라임 대출의 차이는 무엇인지?

돈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만 이해가 쉬울텐데요. 

바로 이점때문에 금융사가 학술적인 가치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입니다.

금융위기라고 하지만 세계금융계를 떠도는 돈의 양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올해 미국의 총 통화 공급 규모는 총 8조7000억 달러로 작년보다 12% 늘었습니다.

물론 그 돈 중 상당 부분을 챙기는 몇몇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공황 이후 가장 심각한 금융 위기라고 하지만 20세기 최고의 조지 소로스는 작년에 24억달러를 벌었습니다.

미국 평균 연봉의 41,000배에 이르는 금액입니다. 월가라면 "잘 했다."라고 칭찬하겠죠.

 

돈이 없는 세상을 한 번 상상해 볼까요? 

약 500년 전, 잉카 제국에는 돈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잉카인들은 귀금속을 미적인 가치로만 평가를 했습니다.

금은 햇님의 땀, 은은 달님의 눈물이라고 불렀죠.

공산주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훗날 잉카 제국의 노동력은 가치의 단위었습니다.

그런데 1532년 잉카인들은 돈 때문에 바다를 건넌 한 유럽 남자를 만나게 됐습니다

엘도라도의 전설을 따라 페루를 찾은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스페인 정복자들이었습니다.

까하마르까 전투에서 잉카군을 무찌른 스페인 정복자들이 본격적으로 금을 찾아 나섰습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볼리비아에 속하는 뽀또시지방에서 큰 덕을 봤습니다.

부의 언덕이라고 불리는 세로리코 산을 발견한 거죠. 해발 4800미터가 넘는 산은 말 그대로 돈의 산이었습니다.

스페인 통치 250년동안 안데스 산맥 광산에에서 무려 62,000톤 이상의 금을 캐냈습니다.

잉카인들은 유럽인들이 왜 금과 은에 열광하는지 의아해했습니다.

피사로와 그 동료들에겐 금속이 이상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죠.

금과 은은 곧 돈이었습니다. 가치의 저장소, 계산의 단위, 휴대할 수 있는 권력이었죠.


아, 광산 안이 으스스한데요. 하, 스페인 통치자들이 강제 노동제를 운영함에 따라 원주민 장정들은 모두 이 광산에서 일을해야했습니다. 8명중 1명은 살아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이 이해가 가는군요.

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세로니코 광부들의 행태는 비슷합니다. 지금은 그나마 돈이라도 받죠.

과거에는 원주민들을 학대하다시피 했습니다.

 

캐낸 은은 수은으로 정재한 뒤에 은괴 또는 은전으로 만들어 유럽으로 보냈습니다

탐욕에 빠진 스페인 왕가는 그들이 꿈꾸던 것 이상으로 부유해 졌습니다.

아 하지만 뽀또시의 막대한 은으로도 스페인 제국의 경제적 정치적 몰락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젠 피사로의 행운이 끝났던 것일까요?

은의 가치를 하락 시킬정도로 은을 지나치게 많이 채취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은전은 더 이상 스페인을 부유하게 해주지 못했습니다.

똑같은 물건에 더 많은 가치가 메겨지면서 물가는 오르기만했죠.

돈은 그 교환 가치만큼만 값어치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겁니다.

은전, 조괴, 금괴 은행권 그 무엇이 됐든간에 

태초부터 오늘날까지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사람들이 그렇다고 믿기만하면 흙이 은전보다 값어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4000년전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이 같은 점토 판에다 금융거래를 기록했습니다.

자 그럼 한번 볼까요. 어디보자 바그다드에서 발견된이 점토판에는 수확 때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곡식 330개를

갚는다고 적혀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이 점토판의 주인에게는 고리 넉대를 준다고 적혀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점토판 주인에게도 곡식을 줬다는 사실입니다.

 

영국의 20파운드 지폐를 살펴보면 눈에 익은 문구가 들어옵니다.

사실상 지폐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고대 바빌론의 점토판과 마찬가지로 그저 지불하겠다는 약속에 불과합니다.

미화 10달라짜리 뒷면에는 하나님을 믿고고 의지합니다라고 씌여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건이나 노동을 제공하고 이같은 종이 뭉치를 받는다는 것은 미국 재무부 장관이 과거 스페인이  지나치게 많은 은을 재취해 은의 가치를 하락시킨 것처럼 종이의 가치를 떨어트리는일은 없다고 믿는것과 마찬가지죠.

어쨋든 사람들은 현재 종이 화폐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돈에도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이 여성은 하루에 수백억 달라를 만집니다. 실상은 만지는 것이아니라 컴퓨터 화면으로 보는 것이죠. 외환 딜러는 돈을 사고 파는 일을 합니다. 하루에 삼조 달러 정도가 이러한 거래 형태로 시장을 오갑니다.

모두 신용만으로 가능합니다. 만질수도 없는데 그저 믿을 뿐입니다. 바로 이런 점을 스페인 정복자들은 간과한 것입니다.

돈이란 곧 믿음이라는 사실을요. 화폐를 발행한 중앙은행에 대한 믿음, 수표를 발행한 은행에 대한 믿음. 돈은 금속이 아니라 믿음임 셈입니다. 종이나 은 점토 또는 컴퓨터 화면이든, 받는이가 믿으면 그 뿐입니다.

 

돈은 상호 신뢰 체제에 근간을 이루며 큰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세계사를 다시 쓸 정도로 큰가능성을 말이죠.

오늘 빌려준 돈을 내일 혹은 모레 돌려받을 수 있다는 확신 영어로 신용이라는 뜻의 크레딧은 라틴어 크레도(Credo)

즉, 나는 믿는다가 그 어원입니다.

신용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면 세계 경제사는 지금처럼 발전하지 못했을 겁니다.

우리는 현대 문명이 대출과 차용에 얼마나 의존적인지 모른채 살고있습니다

물론 돈이 세상을 전부 움직이진 않습니다. 사람들과 용역과 물건들도 있죠?

고대도시 바빌론도 그랬고 볼리비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예상과 달리 초기 대부업자들은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고마워하기는 커녕 천대를 받았죠.

왜그랬을까요?

 

서기 1200년경 이탈리아 북부지방으로 가보죠.

도시 국가들이 서로 다투며 난립하던 곳입니다.

서로를 믿을 수 없는 위험한 시절이었죠.

로마 제국이 남긴 유산 중 하나는 단위가 커지면 계산이 복잡해지는 숫자 체계입니다.

각기 다른 7가지 주화가 유통되는 피사에서는, 상인들을 중심으로 숫자 정립의 필요성이 절실했습니다.

간단한 거래에도 주판이 필요했으니까요. 반면에 동방제국인 이슬람 제국과 중국 송나라의 경제활동은 훨씬 발달했습니다. 유럽은 근대적인 재무 체계를 수입해야 했습니다.

 

이때 피사에서 레오나르도 피보나치 같은 젊은 수학자가 탄생합니다.

피사출신 세관원의 아들로 그의 이름을 딴 피보나치 수열로 유명하죠 피보나치 수열은 그의 저서계산의 책이라고 하는 리베르 아바치에서 소개된 동양 수학 사상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피보나치는 아라비아 숫자가 로마 숫자보다 더 우월하다고 증명했는데 이를위해 그가 제시한 예들은 상업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로마 시대부터 유럽인들은 간단한 셈조차 어려워했습니다.

하지만 아라비아 숫자를 쓰면 각종 계산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피보나치는 회계 환전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자 계산에 새로운 계산법을 적용했습니다.

로마 숫자로 백분률을 환산하는 것이 상상이 되십니까

하지만 피보나치의 리베르 아바치를 보면 무척 간단합니다.

이후 수학을 응용해서 돈을 벌기 시작했죠.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은 금융 제도가 발전하기에 적합했습니다.

피보나치의 고향 피사도 그중하나였습니다.

특히 동방과의 교류가 많았던 베네치아는 대부업의 실험장이 되었습니다.

 

베네치아는 문학 사상 가장 악명을 떨쳤던 대부업자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네치아의 상인에 등장하는 샤일록의 고향이죠.

나를 도와주겠는가? 나를 기쁘게 해줄텐가? 하... 답을 주시게

샤일록은 바사니오의 친구이자 상인인 안토니오가 보증을 서야만 돈을 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3000두캇을 석달 기한으로 단, 안토니오가 보증을 서야하네.

어째서?

안토니오는 좋은 사람이지.

 

여기서 좋은 사람이라는 뜻은 바사니오에게 빌려준 돈만큼 값어치가 있다는,

즉 신용이 있다는 거죠.

 

안토니오에 대해 나쁜 평판이라도 들었소?

아...아니오, 내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안토니오가 신용이 있다는 얘기오.

삼천 두캇 이 채권은 받아도 되겠어.

 

어떤 대출에든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배가 침몰할 수도 있죠

비록짦은 항해일지라도 대부업자는 그 위험에 대해 보상을 받아야합니다

그 보상을 우리는 이자라고 부르죠

 

베네치아에서 해외 무역은 이같은 금전 거래 없이는 불가능 했습니다.

또한 오늘날까지 국제 무역에 근간을 이루고있죠.

그런데 왜 샤일록은 나쁜 인간으로 그려졌을까요?

왜 돈대신 한점의 살, 즉 안토니오의 죽음을 요구했던 것일까요?

어째서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비정한 대금업자를 등장시켜서 악명높은 금융가의 전례를 남겼을까요?

 

그 해답은 샤일록이 유대인이라는데 있습니다.

베네치아에 2주이상 머무는 유대인들은 등에 커다란 노란색 원을 그리거나 노란 모자를 써야했습니다.

그리고 게토 누오보라는 특정 거주지역에 갇혀 살았습니다.

이곳은 베네치아에 유대인 거주 지역입니다.

비록 천대받기는 했지만 베네치아에서 유대인의 존재는 용인됐습니다

그이유는 기독교도 상인들이 하지 않는 서비스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대금업이었죠

피보나치가 이자를 계산해 냈을진 몰라도, 그 이자를 거둬 들인 것은 샤일록이었습니다.

이건물에서 베네치아의 유대인들은 돈놀이를 했습니다

작은 탁자를 놓고 의자에 앉아서 일을했죠.

영어로 은행 뱅크의 어원은, 바로 이 의자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방코에서 유래됐습니다.

상인들이 왜 이곳 유대인들에게까지 돈을 빌리러 왔을까요?

이자를 받는것이 기독교도 상인들에게는 죄악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리 대금에 대한 중세 교회의 엄격한 제한은, 유럽의 금융 발달을 가로막았습니다.

아니 지옥에 간다는데 어떤 상인이 대금업에 손을 대겠습니다.

지옥에서의 영원한 속죄 피렌체의 대성당 두오모에 그려진 이 그림은 조르지오 바사리와 페데리코 주카리의 공동작입니다.

그 아랫부분은 도미니코 데 미켈리노가 단테 신곡의 한 장면을 성당 벽화에 담아냈습니다.

단테에 따르면, 제 7지옥에는 고리대금업자를 위한 자리가 따로 있다고 합니다.

 

고리대금업자가 지옥에 떨어지면 목에 무거운 지갑을 걸고 영원히 고문을 받게됩니다.

이자를 받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도 금기사항입니다.

구약 신명기 23장에는 형제에게 이자를 받으면 안 된다고 나와있지만은 남이라면은 이야기가 또 다릅니다

같은 유대인들끼리는 안 되지만은, 기독교인들에게 빌려주는 것은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고리대금 서비스를 제공한 대가로 유대인들은 사회로부터 소외를 받았습니다

게토 누오보라는 지역에 갇혀지냈고, 유대인하면 돈이라는 고정관념도 수백년동안 사라지지 않았죠

하지만 대금업은 당시 유대인에게 허용된 유일한 경제활동이었습니다.

샤일록은 결국 좌절합니다.

법원 판결은 1파운드의 살점에 대한 소유권은 인정하되, 안토니오를 죽이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유대인인 샤일록에게 살인미수라는 죄목으로 재산몰수와 사형선고가 내려집니다.

개종을함으로써 겨우 살아남았죠.

 

알고보면 상당히 위험한 직업이죠.

베네치아의 상인은 경제학과 유대인 혐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끔 합니다

그런데 그토록 멸시하는 유대인의 돈을 채무자들은 왜 성실히 갚았을까요?

샤일록의 동료들이 같은 말로를 겪지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날에도 원시적인 형태의 대부업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현대판 샤일록도 쉽게 볼 수 있죠. 

아, 이곳은 스코틀랜드의 잔 세틀스톤입니다. 철제 건축 양식으로 서부에서 가장 험한 동네 중 한 곳이죠

이곳의 남성 평균 수명은 64으로

방글라데시의 남성 평균 수명보다도 조금 더 낮습니다

주민들은 대부분 연금을 타기전에 사망을 한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과연 이곳까지와서 돈 놀이를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또 모르는 일이죠.

 

그 주인공은 바로 고리대금업자입니다.

그들에게 담보로 연금 카드를 주면 돈을 빌려주죠

연금이 나오면 그 카드로 우체국에가서 돈을 받아 이자를 더해 갚는겁니다.

샤일록의 영업 구조와 똑같습니다.

현재 스코틀랜드의 고리대금업은 성행중입니다.

글래스고 고리대금업자의 장부 중 일부입니다, 무척 재미가 있는데요.

10파운드를 빌려주면 주말에 12.5파운드를 돌려 받는다

일주일동안의 이율이 25%인 셈이네요.

연 이율로는 무려 11,000,000%에 이릅니다.

 

하루 생활비로 5.9파운드를 쓰는 사람이 무슨 수로 그정도 이자를 낼 수 있을까요?

빚을 모두 갚을수는 있을까요?

하지만 이곳 글래스고에서는 채무 불이행이 불가능합니다.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갚지 못해서 상해를 입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채무자가 돈을 갚지않으면 손해가 크기 때문에, 대금업자는 탐욕스럽고 무자비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부터 21세기의 스코틀랜드에 이르기 까지 고리대금업자들은 천대를 받았습니다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대신에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대부업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관대해도 돈을 벌지 못하고, 너무 비정하게 대해도 채무자들은 결국 빚을 갚지 못할테니 말이죠.

정답은 덩치를 키워 강해지는 것이엇습니다, 드디어 은행을 만들 때가 온 것 입니다.

 

15세기 이탈리아, 신용대부의 핵심기능을 해 온 게토지역에 합법적인 은행이 생겼습니다.

이와함께, 한 가문이 부흥하게됩니다.

바로 메디치가입니다.

메디치가의 번성과 함께, 신용의 시대가 도래합니다.

대부업은 과거와 달리 영광스러운 일이자 새로운 권력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의 권세는 피렌체 곳곳에 유산으로 남아있습니다.

약 400년 동안 메디치가의 딸들이 황실로 시집을 갔고, 아들 셋은 교황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마키아벨리가 메디치가의 역사를 기록한 것은 당연한 일 일지도 모릅니다

메디치가는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미켈란젤로부터 갈릴레오까지, 메디치가가 르네상스시대 전체를 후원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곳 우피치 미술관에는 메디치가 소유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예술품들이죠.

과연 메디치가가 이 예술품들을 전부 사들였을가? 우리들이 간과하기 쉬운 부분입니다.

메디치가는 떼 데 감비오라는 환전업 조합가운데 가장 운이 좋은 가문입니다.

의자에 앉아서 일을 했기 때문에 만치리에 혹은 까블리에리로 불렸죠.

양모 조합 거리인 바로 이 곳, 비아델 아르떼 델라 라나에 최초의 메디치 은행이 있었습니다.

 

1390년대 이전만 해도 메디치가는 동네 불량배에 불과했습니다.

믿을만한 금융 서비스가 아닌, 저질 폭력으로 유명했죠.

피렌체에서 각종 범죄를 저지른 벌로 17년 동안 메디치가의 사람 5명이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러던중에 지오반니 디 비치데 메디치가 등장 했습니다.

그는 메디치가의 영업을 합법화 하는데 힘썼습니다.

결국 고리대금방지법을 피할 수 있는 독창적인 회계법으로 그 꿈을 이루게되죠.

메디치 은행의 장부를 보면 대외 무역 거래에서 상업 어음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 교회는 대출 이자 받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하지만 약삭빠른 상인이라면 무역 거래에 필요한 환전 서비스를 놓치지 않았겠죠.

이자가 없으니 죄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환전의 대가로 적은 수수료를 받았을 뿐이니까요.

 

가불을 받을 경우 그 기간만큼 수수료가 붙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메디치 은행에 돈을 맡긴 예금자들에게도 그에따른 보상이 주어졌습니다.

이자가 드러나지 않는 형태로 신용을 사고 팔았죠.

고리대금업이 은행업으로 진화한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지오반니 메디치가 쓴, 리브로 세그레토에는 메디치 은행의 성공담이 기록돼있습니다.

메디치 은행의 비결은 규모보다 다양화를 추구한데 있죠

이전에 이탈리아 은행들은 개별 사업체여서 단 한건의 불량 채권으로도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메디치 은행은 조합 형태로 운영이 됐습니다.

바로 이 분권 체제가 엄청난 수익의 비밀이었습니다.

 

메디치 은행은 지오반니의 통솔 아래 피렌체에서 베네치아를 거쳐 로마까지 영업망을 넓혀 나갔습니다.

규모확장과 분산을 통해서 대출에 따른 위험을 줄일 수 있었고 이는 곧, 채무자의 비용을 낮추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리대금업자와 은행, 샤일록과 메디치가의 차이였습니다

세금 신고용으로 작성한 자산 목록이 끝이 없는데요, 자 한 번 보겠습니다.

총 91,089 플로린화로 당시로선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죠.

1429년 지오반니는 후계자들에게 자신이 만든 금융 기준을 지키라는 당부를 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오반니의 장례식은 은행업을 떳떳한 장사, 게다가 돈이 남는 장사로 만든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는 자리였습니다.

 

그의 아들 코시모를 통해 부의 축적은 권력의 축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부친이 사망한지 20년 후, 코시모 데 메디치는 피렌체의 군주나 다름 없었습니다.

 

교황은 말했습니다. 정치는 코시모의 집에서 이루어진다.

그가 선택하는 이가 관직을 맡고, 법도 전쟁도 평화도 모두 그가 결정한다.

우리가 부르지 않을뿐 그가 왕이다.

보티첼리의 이 작품은 젊음과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사실은 죽은 코시모 데 메디치에게 바친 작품이죠, 메달을 자세히 보면 이탈리아어로 나라의 아버지라고 세겨져 있습니다.

 

150년만에 메디치가는 뒷골목 불량배에서 유럽 금융계의 큰 손으로 탈바꿈 했습니다.

동방박사의 경배라는 이 작품은 메디치가가 이륙한 금융 혁신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림에 나오는 세 동방박사의 실체는 예수의 발을 닦는 코시모와 그의 아들 피에로 그리고 지오반니 입니다.

왼쪽에 칼을 든 젊은이는 로렌조고요

메디치가에 선사하기 위해서 은행 조합에서 주문한 그림이었습니다

그림 제목을 메디치가에 대한 경배로 바꾸는게 나을뻔했죠.

지옥으로 떨어질 운명의 은행가들이 하느님과 가장 가까워진 셈이죠

돈의 힘을 가장 잘 표현한 대목이 아닐까요?

결국 메디치가에 의해서 현대 금융업이 탄생했다고 봐야겠죠.

돈으로 정치 권력을 거머쥔 세력은 메디치가가  처음이었습니다.

금융의 세계는 클수록 좋다는 원칙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규모를 키우고 사업을 다양화시켜서 위협을 분산시켰습니다.

대출 뿐만아니라 외환 업무에도 집중함으로써 불량 채권을 줄일수가 있었던 것이죠

이 모두가 코시모의 가족들에게는 훌륭한 사업 모델이었습니다.

 

그러한 메디치가도 불사신은 아니었습니다. 귀족들에게 너무 많은 돈을 빌려줬다가

큰 손해를 입기도 했죠. 귀족들은 돈을 갚지도 않고 태연한 얼굴로 돈을 받으러 온 은행직원들을 쫒아냈습니다.

어느 은행이든 불량 채권은 골칫거리입니다.

얼마동안 현대 은행가들을 이 해묵은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자신들이 메디치가의 사람들보다 똑똑하다고 믿었겠죠.

 

피렌체의 지구 반대쪽 도시 테네시주 멤피스입니다.

세계 경제의 판도는 르네상스때와는 달리 변해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현대 금융이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크게 달라진 것입니다.

미국은 채무를 발판으로 성장한 나라입니다.

메디치 은행이 부유층을 상대한 반면에, 미국 은행들은 누구에게나 돈을 빌려줍니다.

멤피스는 파란 스웨이드 신발, 립 바비큐 구이 그리고 파산자들로 유명합니다.

멤피스의 사람들은 빚을 갚느라고 허덕입니다.

 

쇼핑몰 이름이 아주 노골적이네요

식료품 가격은 저렵합니다.

저 소득자에대한 세금 감면 제도를 알려주는 세무사가 있습니다.

차량 소유권을 담보로 돈을 빌릴 수도 있다는 군요.

급여를 담보로 돈을 빌릴 수 있는 가게가 있고, 백화점만한 전당포도 있습니다.

전당포에 맡길 만한 게 없으면 여기 GLB 플라즈마에서 25달라씩 받고 피를 팔면 되는데요,

아,피를 빨아먹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사실이군요

파산자들을 상대로 먹고사는 경제라니, 그저 놀랍습니다.

 

한편으로 글래스고 동쪽 끝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고리대금업자들이 돈 대신 살을 떼어가는 세계와는 천지 차이입니다

이곳에는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들이 넘처나는데도 불구하고 대부업으로 돈을 버는 요령을 터득한 것 같습니다.

 

이 친구는 리치입니다.

채무자의 빚 대신, 차를 회수하는 일을 하고있죠.

리치: 총을 잡고서는 철컥철컥, 총에 탄알을 넣는게 보였어요. 총대로 한 대 얻어 맞고 바로 여기요 죽는 줄 알았습니다

갑자기 채무자가 트럭을 내놓던가, 목숨을 내놓던가 라고 소리치더라고요.

이렇게 들으니 영화의 한 장면 같군요 저도 직업을 바꿔야겠습니다.

리치: 헤.긴장감이 넘치죠...

파산의 도시에서 차를 회수당하는 경우는 흔한 일입니다.

자동차 회수 연합은 매주 차량 500대 가량을 되팝니다.

자동차는 경매로 팔리고, 새 주인 역시 대출 이자가 밀리면 그 차는 회수돼서 재활용됩니다.

멤피스지역의 이 같은 일들은 다른 채권 회수자들이 하는 일과 비슷합니다

규모가 엄청나다는 것 말고 다른점을 찾는다면 불량 채권의 회수와, 담보물의 재 판매가 모두 쉽게 이뤄진다는 점입니다.

이곳 주민들은 빚지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자본주의 경제가 손쉬운 파산에 기반을 두고있는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집안에 남는 물건 없이 차까지 회수당하고 나면, 파산 전문 변호사의 도움을 받게됩니다.

작년 한 해동안 테네시 주민 중 13000여명이 파산 신청을 했습니다.

 

변호사: 그럴경우 생각지도 않게 월 납입금이 오르게 됩니다.

 

파산자들은 매주 변호사와 만나서 채무이행 계획을 세웁니다

 

아 이 경우에는 재택 융자금이 있네요, 차 할부와 아. 차가 두대군요. 다른 채무항목은 없는 것 같은데요.

사실은 차가 세대입니다. 

세대요?

예,이웃 주민 소유의 차량인데 그것을 담보로 잡혔군요.

아, 자세히 좀 말씀해 주세요. 채무금액이 얼마고 지금 빚을 어느정도 갚은거죠?

총 채무액이 241달라 11센트였는데 107달라로 줄었군요

와 원금을 반으로 줄였네요.

 

1996년에서 2006년까지 미국에선 매년 100만건에서 200만 건의 파산신청이 접수됐습니다

대부분 돈을 갚는 대신에 파산을 선택한 것이죠

중세 이탈리아와 영국에서 파산은 경제적으로 무척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선 좀 다른 것 같군요.

미국 자본주의의 특징은 빚을 졌다 하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1세기 미국에는 19세기 영국처럼 빚을 갚지 못하면 끌려가는 채무자 감옥도 없습니다.

1898년부터 모든 국민에게 파산법 7장과 13장에 따라 채무청산과 개인 회생 신청이 보장됐기 때문이죠.

인간이 태어날부터 자연적으로 부여되는 천부인권에 파산권도 추가된 셈입니다.

 

미국의 법은 기업가를 위해 존재합니다. 새로운 사업이 가능하게끔 말이죠

한 두번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한 번의 실패 때문에 좌절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죠.

오늘의 파산자가 내일의 억만장자가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미국에서 성공한 인물들을 살펴보면 초기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소설가 마크 트웨인, 코미디언 버스터 키튼, 포드 자동차 회사 사장으로 유명한 헨리 포드도 그 중 한명입니다.

이들의 성공은 실패 후 재기의 기회자 주어졌기에 가능했습니다.

은행 입장에서는 대출가운데 일부가 연체됐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파산법 13장에 따르면 채무를 없에는게 아니고 채무이행계획을 다시 세우는 것 뿐이니까요.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오처럼 대부업자를 불쌍한 채무자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 취급해서는 곤란합니다.

대출은 경제 성장의 기초입니다. 하지만 은행이 출현이 가능해야 고리대금업에서 한 단계 올라갈 수 있습니다.

채무자들이 정상적으로 대출을 받을 수 있을 때 비로서 고리대금의 횡포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투자자도 돈을 믿고 맡길 은행이 있어야만 자신의 지갑을 엽니다.

여기서 잠깐만요, 은행이 해결책이라면 지난해 왜 다들 파산신청을 했으며, 왜 금융 위기가 터졌을까요?

멤피스의 불량 채권이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야기한 배경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은행의 주택 담보 대출이 증권의 형태로 바뀌어 무분별한 투자자들 사이에서 거래되면서 은행과 채무자의 정상적인 관계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은행업이 아주 간단했습니다. 363의 법칙, 즉 예금이자는 3%, 대출이자는 6%, 오후 3시에는 골프치러 간다는 뜻인데요, 요즘들어 금융업이 지나치게 복잡해졌습니다.

연이은 금융혁신으로 멤피스같이 가난한 동네의 가정에서 받은 주택담보대출을 CDO 즉 부채담보부증권같이 겉으로는 그럴뜻 해보이는 투자 상품으로 바꿔버렸습니다.

납을 금으로 만들고, 쓰레기를 우량 채권으로 만드는 금융 연금술이 가능했던 것은 은행과 함께 현대 금융의 양대 축을 이루는 채권시장이 급성장했기 때문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본드씨에게 채권 이야기를 직접 듣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내 공부하기

1. 교수

2. 은행의 파산, 금융시장이 붕괴, 주식시장 폭락 이유는?

3. 서브프라임과 프라임 대출의 차이는?

4. 현재 미국 총 통화 공급 규모와 한국의 총 통화 공급 규모는?

5. 조지 소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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